< 공공건축에 대하여 >

▷ 기적의 도서관 : 도정일 서문

▶ 무주프로젝트와 공공건축





감응의 건축 (현실문화 2008)에서 발췌
> 무주프로젝트와 공공건축
새로운 사회적 의제: 성찰적 한국

무주 프로젝트의 기본 개념: 뜻있는 그림일기
꼭 무주에 국한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성의 문제다. 삶의 요구들을 공간적으로 다루는 일들, 여기저기에 펼쳐진 건축물들은 마치 ‘산자락의 오솔길’처럼 사람들이 다니면서 지속될 것이다. 지속하는 것들이 그 지역의 역사가 되고 집단기억으로 남아 궁극적으로는 공유되는 문화가 될 때 가치 있는 일들로 평가될 것이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 필자는 제발 그러길 바랄 뿐이다. 필자에게 무주의 의미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길처럼 남아서 의미 깊은 ‘그림일기’로 작동하는 데 있다. 그리고 필자가 무주에서 쓴 그림일기들을 다른 이들도 향유하고, 무주에 대한 애정이 다름 세대로 면면히 이어질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래서 필자는 무주의 공공프로젝트를 생각할 때마다 작은 길을 떠올리게 된다. 산자락에 난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내가 이룬 일이 마치 저 언덕의 길처럼 존재할 수 있으면 하는 염원에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 길을 걷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바로 이 길의 역사에 편입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의미 깊은 일인 것이다. 만약 세대 간 단절이 더 중요하다면 땅의 역사를 각별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 길을 의미 깊은 그림일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떤 길목에서 할아버지가 보던 풍경을 똑같이 아버지가 바라보았고, 나 또한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대한 사건이자 역사다. 동일한 풍경을 동일한 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길은 풍경을 기록하고 보존한다. 길은 풍경을 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홈 파인 레코드파이 소리를 저장하듯 말이다. 그래서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은 이렇게 오래된 길들을 그림일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길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무엇으로 길은 유지되는가? 길은 반복적 몸짓으로 탄생하며, 반복되는 못짓은 생존에 요긴했던 ‘가까운 것’, ‘친근한 것’들을 엮어주면서 생겨난다. 밭을 갈고, 멀리 떨어진 새로운 땅을 일구고, 집을 짓고 이웃을 연결하는 길을 내는데 이는 수백 년 동안 반복되고 체화된 아비투스로 비롯하는 것이다. 삶의 근간을 이루는 공동성의 체험이야말로 길이 만들어준 결과다. 이런 길들로부터 유추해 필자는 ‘농촌의 삶’의 역사 전체가 길의 역사요, 길은 또한 ‘근접성의 법칙’이 가장 강력하게 각인된 흔적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앞으로 공공건축만이 아니라 일반건축에서도 깊이 있게 들여다볼 대목이다.

- 근접성의 미학
가장 하찮고 별 볼일 없는 것들, 하지만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들, 그런 몸짓들이 삶을 지속시키고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원동력이다. 이것을 우리는 일상이 만드는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전제된다. 하나는 근접성이고, 다른 하나는 체험이다. 몸으로 체험해 육화되어 있는 근접성, 근접성으로 인해 몸속에 각인된 매일매일의 기억, 모더니즘에 의해 배제되었던 자연, 인간의 본성, 이성에 의해 배제되었던 감성, 그리고 자유로운 대지의 상상력으로 우리의 원초적 삶의 역사는 잉태되었다. 따라서 이웃과 더불어 체험된 오래된 미래의 농촌은 어떻게 새로운 체험과 근접성의 이름으로 일상을 특징짓고, 새로운 삶을 조직해 내며, 나아가서는 새로운 공동체에 다가서게 할수 있는가? 무주 프로젝트의 핵심은 바로 각각의 작업을 통해 어떻게 이러한 과정들이 자연스럽게 재생되는가 하는점이다. 이를테면 무주 공설운동장의 등나무와, 안성면의 공중목욕탕, 부남면의 별 보는 집들은 마을 사람들의 친근한 이웃이 되어 친숙하고 익숙하며, 매일매일의 삶에 각인되어 체험되고, 그런 것들이 모여 공동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또 다른 가능성과 잠재력을 잉태할 때 ‘근접성’의 법칙이 확인된다.
즉 무주의 프로젝트들은 농민들의 사회관계를 뿌리내리게 하는 ‘부식토’로서의 장소를 만드는 일이다. 마을 사람들의 사회관계를 창건하는 장소로서의 건축은 가능한가? 이것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것이 바로 무주에서의 일들이다. 그렇게 해서 농촌의 문제를 새로운 사회적 의제로 상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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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건축
원했거나 잊혔던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장소는 추상적이지도 않고 이론적이지도 않다. 언어, 관습, 음식, 육체의 자세들이 감각 속에 뿌리내리게 하고, 그렇게 해서 나타난 가치들은 유기적으로 새롭게 조직된다. 모더니티를 통해 배제되었던 것들, 그 자잘하고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부활시키고 건축과 통합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과 식물과 시간이다. 지난 10여 년간 필자가 무주에서 한 작업들은 그래서 필자에게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며, 그것은 사람과 식물들에 의해 헤아려지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이것이 바로 건축을 오브제처럼 단독적이고도,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으로 확장된 전일적 접근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건축이 탈산업사회에서 농촌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능과 공간으로 포섭하고 자유로운 형태로 사람들을 유혹할 일이 아니라 근접성의 법칙과 체험에 각인되는 삶의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체험은 정신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갈등까지를 포함하는 ‘가까운 것들’. 사랑, 평화, 애정이 깃든 모든 것들은 근접한 데서 시작된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생길 수 있겠는가! 부부간에, 또 부모와 자식 간에, 이웃 간에, 자연 간의 사이에서 온몸으로 체험되고 기억되는 것들, ‘내면화된 타자들’이 존재의 근거들이다.
그리고 가까우 것일수록 가치 있는 것이 된다. 밭, 나무, 마당, 느티나무, 마을에 있는 모든 외부 요소까지도 신체와 접촉하면서 기억을 만든다. 각자의 기억과 공동체의 기억은 집단기억으로 교차되고 켜켜이 돌이킬 수 없는 역사가 된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그동안 살아왔던 공동체의 모습이었다면, 건축이 강조하고 확장해야 할 ‘접촉’의 대상은 무엇이며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그것은 바로 자연과 또 다른 인간이다. 모더니즘에서 배제되었다고 선언하지 않은 채로 소외된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 그것을 다시 점검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무주는 필자로 하여금 이런 점들을 각별히 성찰하게 만들었다.

렇다면 과연 모더니즘 건축에서 배제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과 인간이다. 여기서 자연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자연이기도 하고, 자연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성 같은 것이기도 하다. 자연은 스스로 아름답다. (자연은 어떤 학교도 다지니 않았다.) 사람이 손을 대지 않을수록 자연은 풍성하고 아름다워진다. 사실은 아름답게 보인다는 말도 필요 없고,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존재해야 하기 떄문에 그 자체로 온전하다.
자연을 관통하는 것은 다양성의 법칙이다. 자연은 단일하고 획일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유기적으로 보완하고 존중하기 위해서 경쟁한다. 그러면서 결국 궁극적으로는 풍성한 쪽으로 이동한다. 100미터×100미터 면적에 단일 품종 나무를 100그루 심는 것과 20~30가지 여러 품종을 100그루 심었을 때, 30년이 흐른 뒤에는 어떤 생태적 결과가 나타날까? 똑같은 나무를 여럿 심은 것보다 여러 품종을 섞은 그룹이 훨씬 풍성하고 오묘한 풍경을 만들어낼 것이다. 다품종 사이에는 성장하면서 경쟁심이 생기고, 거기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이 솟아난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서로 섞이고 대화하는 잠재력과 가능성이 폭발한, 자연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일한 품종을 심은 곳은 나무들이 성장하기는 하지만 외롭고 쓸쓸하고 나중에는 더 자라지 못하고 죽을 준비를 하게 된다. 산에 가면 솔방울이 많이 달린 소나무들이 있는데, 이들은 죽어가는 준비를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세상을 하직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손을 번창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가기 전의 몸부림으로 솔방울을 쏟아내는 소나무, 자연도 자기가 죽을 것을 아는 것이다.
건축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삶 또한 풍성하려면 자연의 속성과 결합해야 한다. 필자가 모더니즘에서 놓친 것이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더니즘 건축이 자연으로부터 결별해서, 건축의 자율성에 대해서는 많은 발전을 일궈냈지만, 도대체 건축이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놓친 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사실 건축이 한반도와 같은 오래된 땅에서 풍성하게 피어나려면 자연과 결합해야 한다. (무주 프로젝트에는 계획할 때부터 건축이 자연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끊임없이 담겨 있다.)
또 하나, 필자가 모더니즘이 사람을 배제했다고 보는 것은, 모더니즘 건축에서는 인간마저도 도시나 건축 속에 사는 기계로 대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건물에 대해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거나 색다른 이야기를 하면 건축의 기능과 어법을 모르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인간이 갖는 수많은 잠재력과 가능성을 소외시키는 일이다. 건축가가 지은 건물 속에서 ‘사는 법’까지도 건축가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 모더니즘 건축 안에서는 합리적이고도 이성적인 생각일지 모른다. 건축의 이름으로 감각까지도 지배하려는 것이다. 모더니즘 건축이 한정해 놓은 그 범위를 벗어나면 건축의 가치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더니즘 건축에서 금기시하는 목록을 따로 만든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간의 상황은 마치 그런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은 또 배운다.
모더니즘이 배제한 사람은 감성적이고, 상상력의 한계를 늘 박차고 나가는 존재다. 왜 우리는 똑같은 집에서 살아야 하나? 감성과 상상력과 집이 허용하는 범위를 넓힐수록 얼마나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가? 사실 삶에 제일 근사한 집은 창고 같은 집이다. 집은 칸 많이 치고 세련된 디자인을 가미하고 기능적으로 분할된 공간이 아니라 살던 모든 것을 수용하는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 사람의 상상력과 감성을 인지하는 건축은 변경이 가능한 공간으로 우리의 삶을 해방시켜 주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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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에서 배제한 것들
그렇다면 건축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건축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친환경적 건축은 태양열과 풍력에너지를 활용하고 단열 효과를 높이는 데만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열린 공간의 건축을 다시 자연을 향해서도 열어두고 몸(건축)을 맡기는 일, 그런 일도 중요하다. 나무로 조경을 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건축과 더불어 건축하는 일, 그런 것은 가능한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많은 식물들은 계절의 시간을 알려주는 근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거축에서 활용해야 한다. 자연은 변화하는 시간을 포용하며 그럼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편안함을 준다. 건축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자연의 형상을 닮게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내제된 시간성, 빛, 바람, 구름, 별, 먼지, 그림자, 하늘 등을 건축에 ‘결합’시키는 것이다. 특히 무주 같은 땅에서 자연을 어떻게 사람의 집으로 끌어들이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소중하고 중요하다. 이를테면 무주 납골당(무주 추모의집)도 건물은 콘크리트지만 그 주변을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은 식물이 하는 일에 달려 있다. 소나무, 대나무, 인삼밭, 풀, 구름 등은 그곳에 서 있는 모든 것을 에워싸며 변화시킨다. 아마 30년 후의 무주 납골당 풍경은 식물이 해낸 엄청난 일로 인해 지금과 많이 다르게 변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납골당은 여전히 미완성이며 새로운 관계를 향해 열려 있는 미지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건물과 식물의 관계는 단지 시각적 관계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역할과 의미를 함께 나누는 데 달려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식물들이 자라났을 때, 건물은 비로소 완성된다.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으로 중첩된 지역은 조물주가 이미 절반 이상을 건축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점에서 이런 땅 위에 건축을 한다는 것은 잠시 존재할 수 있는 건축물을 땅 위에 올려놓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즉 땅을 기능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건축과 땅이 결합하면서 자연을 더 자연답게 하고 건축을 더 건축답게 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정할 때 좋은 건축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무주와 같이 자연이 압도적인 지역에서는 자연의 힘을 빌려 건축의 인공적인 부분을 많이 상쇄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즉 한자리에 정지되어 있고 시간의 때가 묻은 물질로 구성된 건축물과 끊임없이 자라나고 변화하는 식물이 교차되었을 때 서로가 서로를 값어치 있게 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배려된 건축이란 누구를 위한 건축인가? 그것은 사적인 영역보다 공적인 영역에서 더 크고 절실하게 요청된다. 소위 공공건축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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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건축이란?
사회는 늘 변화하고, 변화하는 사회는 끊임없이 필요한 것들을 새롭게 요청한다. 건축은 필요에 의한 것이다.
건축의 첫 번째 본질은 필요성이다. 사적인 필요가 사적인 건축을 낳는다면, 공적인 필요는 다수를 위한 ‘공공건축’을 탄생케 한다. 따라서 공공건축에서 첫 번째 문제가 되는 것은 ‘필요성’이란 것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인지 아닌지 묻는 점이며, 둘째는 어떻게 그 규모와 형식을 갖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적 건축은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시장경쟁 시스템에 의해 생성하고, 그 기본 출발점은 ‘자본의 요구’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공공건축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하면서 ‘자본이 생산해 낼 수 없는 공간을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공공학교나 사회복지시설, 공원, 공공기관들은 공적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자본은 소비자를 위한 공간을 생산하지만, 공공건축은 주민 또는 국민을 위해 만들어진다. 그것은 소비의 공간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서 제외된 영역을 보살피고 뒷바라지하는 공적인 영역이다. 따라서 공공건축은 이를 필요로 하는 대상에게 온전한 해답을 마련하고 공급할 의무가 있다.
무주에서 진행된 30여 개 프로젝트는 하나같이 공공을 위한 건축이라 불릴 수 있다. 공공이 발주하고 공적자금이 투입되어서가 아니라 주민과 국민의 삶의 질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공공건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 대전제야 말로 우리가 ‘공공+건축’에 거는 기대이며 소명이다. 그것은 공공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다.
어쨌든 공공건축이야 말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설계된 것이다. 이는 바로 공공건축이 본질적으로 좀 더 높은 보편성을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성이란 특정 개인의 취향에 화답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다수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배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또한 어떻게 지역성을 반영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공공이 해야 하는 것은 돈으로 생산 할 수 없는 지역의 문화와 지역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일이다. 마뉴엘 카스텔이 주장하는 집합적 소비재들(병원, 학교, 공원, 복지시설 등)의 공공건축에서 건축행위의 ‘필요성’에 대한 검증과 지역의 정체성에 대한 검증이야 말로 건축 이전에 철저하게 고민해야 하는 요체이기도 하다. 이런 뜻에 잘 회답할 때, 공공건축은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 소통의 공간으로 이행될 것이다.
결국 내가 무주에서 체험한, 공공건축에서 발견한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의미는 다시 ‘지역성’의 발견이란 이름으로 환원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의 뿌리는 좋은 흙을 찾아 여행한다. 감응의 여행이다. 생명의 여행이다. 자기 몸을 지렛대 삼아 100년, 200년, 나아가서는 1000년을 시간과 더불어 자라나는 나무 곁에서 기껏 몇십 년을 위해 거축을 한다는 것은 왜소해 보인다. 그래서 건축은 사회적 소임을 다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영원한 행위는 아니다. 몇몇 문화유적이 인간의 역사를 증거하기 위해 남아 있는 것은 좋지만, 건축이란 본시 인간의 삶을 한시적으로 수용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건축은 제한된 시대를 반영하고 가치를 반영하므로 늘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공공건축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공공건축은 너무 완벽하고, 거창하고 비싼 것이 아니라 한시적이라는 과정적인 점을 깊이 인식하고 새로운 가치를 담아낼 준비를 하면서 의미 있고 소박 할수록 좋은 것이다.
그래서 무주의 여러 일들에서 자연과 인간을 연관시켜 사고한 것이다. 그러나 욕심은 있다. “내가 나무 한 그루만큼만 건축을 할 수 있다면”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무가 부러워진다. 오랫동안 지구의 삶을 수용하고, 가능하게 하고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곤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생명을 아우르는 ‘집’이 바로 나무이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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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조절자로서의 건축가
모더니즘 건축이 사람과 자연에서 멀어졌다고 할 때, 무주의 등나무 이야기는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무주 공설운동장은 어느 한 군수가 주민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것에서 시작했다. ‘너도 본부석에 앉고 싶으면 군수가 되어라’라고 권위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행사 때마다 나만 그늘에 앉았구나’ 하는 각성에서 시작된, 공설운동장에 240여 그루의 등나무 심기는 새로운 건축의 시작이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얼마나 근사한 건축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얼마나 자율적으로 조직해 나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운동장을 찾은 군민들에게 그늘과 그림자를 만들어 주려는 생각을 하는 것, 확고한 신념으로 등나무를 심은 것은 이미 무주 군민의 삶을 설계하고 조직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주 공설운동장 설계에서 내 역할은 결국 군구싀 뜻과 말을 해석한 것뿐이다. 필자는 번역자, 공간적으로 모든 것을 번역한 번역자인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도대체 건축가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고……. 그들은 만능인도 아니고 온갖 지식을 갖춘 해결사도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지배하고 조직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건축가는 해결사가 아니라 변화하는 다양한 현재적 삶을 더 잘 조직하기 위해 여러 분야를 이해하고, 매개하고, 조절하고, 조합하고, 그러면서 판단하고, 번역하고, 해석하고, 형태화하는 사람이다. 즉, 끊임없이 자기 혼자만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이외의 수많은 전문가, 수많은 사람, 기술, 경향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하는 독특한 전문가이고 조절자이다. 한마디로, 건축가는 여러 곳에 감응하는 열린 사람인 것이다.
필자가 공설운동장만이 아니라 무주에서 한 수많은 일은 건축가의 새로운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조절자’로 서의 역할을 한 것과 같다. 그래서 현대 건축가는 형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판단력 있게 조절하고 건축의 행위로 이행시키는 사람이다.
특히 현재와 같은 전환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축가는 우선 무엇이 사회적 필요성인지를 판별하고 여러 분야 사람들의 의견을 조절하고, 규합하며 그 시대에 맞는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나가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위대한 건축가보다 우선 사회적인 필요성에 화답하는 보편적 해답을 보다 다수를 위해 생산해 낼 수 있는 ‘사회적 조절자’로서의 보통 건축가가 필요하다. 그런 건축가를 이 사회가 요구한다는 사실을 필자는 무주의 일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이제 산업화 이후 민주화 사회로 이동한 한국사회는 ‘양’만이 아니라 ‘질적’으로 우수한 사회로 이동해야 한다. 건축가들도 따라서 이 일에 동참해야만 한다.
보다 다수를 위한 좋은 건축, 좋은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필자는 ‘건축의 민주화’라고 부르고 싶다. 사회적 조절자로서의 건축가란 바로 이런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건축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무주의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건축가, 즉 사회적 조절자로서 해야 하는 공통적인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주민들로 하여금 무주에서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면마다 자기 정체성을 부각시켜 주는 일이다. 이런 일이 동시에 겹쳐질 때, 지역의 삶이 생기 있게 살아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한두 갱의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한자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살피고 새로운 가치로 조직해 내고, 그런 과정을 섬세하게 구상하는 공공건축가 제도가 절실한 때이기도 하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세상과 건축가들은 이 점에서 화해하고 천민자본주의의 고삐 풀린 말들을 공공의 이름으로 붙들어 매어둘 일이다. 자유시장경제, 경쟁의 논리로부터 보호받고, 보호되어야 할 공공의 영역이 확장되고 의미 있게 살아날 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자유주의체제를 비난만 하는 근거도 사라진다. 높고 아름다운 나라, 성찰적 한국을 만드는 일에 모두가 동참할 때다. 이것은 ‘감응의 건축’으로도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것들의 소중함을 무주에서 배웠다. 그래서 무주의 사람들과 땅과 자연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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