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건축에 대하여 >

▶ 기적의 도서관 : 도정일 서문

▷ 무주프로젝트와 공공건축





기적의 도서관 (현실문화 2010)에서 발췌
> 정기용과 기적의 도서관
도정일(경희대 명예교수,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상임대표)


‘기적의 도서관’은 어느 날 하늘에서 천사가 실어다 준 것도 아니고 땅에서 도깨비들이 뚝딱 빚어낸 것도 아니다. 그 명칭 속의 ‘기적’이라는 말과 상관없이, 적어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의 전사(前史)에는 기적이랄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공공의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뭉쳤던 많은 사람들의 고된 노동과 아이디어, 밤잠 설치게 했던 고민과 순수한 열정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기적의 도서관이 어떻게 기획되고 진행되었는가, 결과는 어떠했고 무엇을 이루었으며 지금은 어떤 상황인가 등등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은 ‘이야기’의 형식보다는 ‘보고서’의 형태로 먼저 기록되어 나오는 것이 마땅하다. 아무리 줄여 말해도 그 기록은 한 시대의 사회사, 문화사, 시민운동사의 일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보고서를 펴내는 일은 기적의 도서관 건립운동을 주도했고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는 민간단체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이하 ‘책사회’로 줄임)의 책임이다.
그런데 그런 보고서 이전에, <책사회>가 일에 치어 꾸물거리고 있는 사이에, 기적의 도서관 설계 부분에서 절대적 역할을 맡아주었던 정기용 교수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이 도서관의 설계, 탄생, 의미에 관한 그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미안하면서 고맙고, 죄송하면서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정기용이라는 한 탁월한 건축가가 아니었다면, <책사회> 사람들이 어느 날 운 좋게도 인사동 골목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기적의 도서관이 지금의 모습으로 탄생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말부터 해놓고자 한다. 그는 상상력 넘치는 공간의 시인,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비저너리, 공적 가치를 세우는 일이라면 망설임 없이 헌신하는 공익 근로자이다. 2003년 봄 기적의 도서관 제1호관을 짓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을 때, 준비자들을 난감하게 한 것은 개인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돈 안 되는 일에 뛰어들 줄도 아는 그런 어리숙한 건축가를 어디서 구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준비자들의 머릿속에는 그때까지 한국은 물론 세계 여타 지역에서도 이렇다 할 모델을 찾기 어려운 아름답고 쾌적하고 창의적인 어린이 전용 도서관의 건립이라는 막연한 그림만 들어 있었다. 참고할만한 모델이 사실상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그 도서관은 설계자의 머리에서 완전히 ‘창조’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고, 따라서 설계자는 단순 건축가가 아닌 시적 감성과 상상력의 소유자여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자원은 결코 넉넉한 것이 아니었고 시간 역시 촉박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공간의 시인, 비저너리, 공익 헌신이라는 3박자 조건을 갖춘 설계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말이 좋아 3박자 조건이지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3박자는 우리 사회에서 ‘바보의 조건’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옳다. 정기용은 우리가 만난 그런 탁월한 바보 건축가이다.

우리가 정기용 교수에게 주문한 것은 한 살짜리 꼬맹이들도 안방에서처럼 기고 뒹굴고 놀 수 있는 어린이 도서관, 아이들이 보고 싶은 책 보면서 즐겁게 꿈꾸고 상상하고 몽상에 잠길 수 있는 도서관, 책 말고도 노래, 춤, 그림, 공작 같은 여러 가지 활동도 할 수 있는 그런 도서관을 설계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도서관에는 이야기방과 다락과 토굴이 있어야 하며 영유아실과 수유실, 다매체실과 전시공간과 다목적 놀이공간이, 그리고 나무와 꽃과 별과 구름이 있어야 했다. 어린 혼들이 훈육과 경쟁의 장을 떠나 맘 놓고 춤추며 자랄 수 있는 놀이터 같은 도서관, 그림책에서처럼 신기한 마법의 성이 날아와 앉은 것 같은 도서관. 그런데 그런 도서관이 가능할까요, 그 쥐꼬리 예산으로? 우리가 물었을 때 정기용은 웃으며 간단히 대답했다. “가능하지요.”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의 그 소년 같은 대답은 사실은 그 일이 가능해서 가능하다기보다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것으로 바꿔내보자는 순수한 열정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가 어찌 몰랐으랴. 우리는 그의 건축가적 재능 말고도 그가 지닌 그 열정과 헌신의 능력을 믿었다.

기적의 도서관 제1호관인 순천관 개관식이 열린 2003년 11월 10일, 조충훈 당시 순천시장은 촬영 나온 문화방송(MBC) ‘느낌표’ 팀의 김영희 PD 일행을 맞으며 “이건 건물이 아니라 예술이야, 예술!”이라 말했다. 그날 개관식 참석자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들이 일찍이 본 적 없는 놀라운 도서관, 이 땅에 처음 들어서는 어린이 전용 도서관다운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을 이렇게도 지을 수 있구나”라며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도서관 인근 주민들과 순천시민들의 반응도 ‘놀라움’그 자체였다. 그날 개관식 공식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순천의 아이들은 조충훈 시장에게로 달려가 매달리고 안기며 환호했다. 자치단체장이나 지역 정치인이 아이들에게 그토록 열띤 환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다. 나중에 조 시장은 기적의 도서관을 지으며 자기가 두 번 울었다고 술회했다.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울었고, 아이들을 그처럼 즐겁게 해줄 일을 왜 진작 해주지 못했나 싶은 후회 때문에 또 울었다는 것이다. 도서관 내부를 그날 처음으로 둘러보고 나온 동네 젊은 엄마들은 ‘설계 선생님’ 정기용의 손을 잡고 “고맙다, 고맙다”를 연발했다.

그 예술품 같은 순천 기적의 도서관을 짓는 데 걸린 기간은 놀랍게도 불과 석 달이다. 2003년 7월 5일에 기공식이 있었고 10월 초에 일단 완공을 보았으니 더도 덜도 아닌 석 달만에 근 4백 평자리 도서관 공사를 끝낸 것이다. (개관식은 나중 다른 사정이 생겨 당초 계획보다 한 달 연기된 11월 10일에 있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석 달이라는 공기가 믿어지지 않는다. 그해 여름에 웬 비는 또 그렇게 많이 내렸는지, 8월 한 달의 거의 대부분은 모두 우장을 쓰고 공사를 진행했다. 개관식 공지를 내보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벌써 다 지었다고? 도깨비냐?” 정기용의 섬세하고 복잡한 설계도면을 읽어내기 위해 꼬박 일주일 ‘공부’했다는 시공회사 유탑건설의 모득풍 현장소장과 공사현장 직원들, 빗속에 수없이 서울-순천 사이를 오가며 감리를 맡아준 한미파슨스의 정환수 차장, 각종 행정업무를 신속히 처리해준 순천시청 사람들-도깨비가 있었다면 이들이 그 도깨비였다. (이 도깨비 군단 속에는 거의 혼자서 업무 연락과 관련 사무를 담당했던 <책사회>의 신은미 간사와 무서운 추진력을 발휘했던 당시 사무처장 서해성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책사회>와 함께 기적의 도서관 사업을 진행했던 문화방송 ‘느낌표’ 팀의 김영희 PD는 개관식 날 도서관 내부를 둘러보며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아주 좋다”며 연신 만족과 놀라움을 표시했다. 꼬맹이들이 맨발로 기어다니고 뒹구는 따스한 열람실 온돌마루를 걸으며 김 피디는 “어찌 온돌마루를 깔 생각을 다 했을까이”라며 신기해했다. 실제로 공공도서관에 전관 온돌마루를 깐 것은 기적의 도서관이 처음이다.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 들어오면 책을 만지기 전에 손부터 씻게 안내된 입구의 세수대, 앙증맞게 이쁜 화장실,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동그란 돔 모양의 이야기방, 먼 우주로 날아가는 듯한 2층의 별나라방, 아파트의 납작한 주거공간에 같혀 사는 아이들에게 공간의 서로 다른 높이와 차원을 체험하게 한 복층구조,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열람실의 나무들, 마루바닥의 평면을 깬 오목공간, 극장식 구조를 가진 다목적 활동곤간, 달팽이처럼 돌아오르는 외부 비밀의 정원-순천관의 이런 공간구조와 연출은 어린이 도서관이 어떻게 지어질 수 있고 지어져야 하는가를 우리 사회에, 어른들의 세계에, 그리고 도서관계와 학계에 두루 제시한 최초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물론 설계자나 <책사회>가 생각했던 모든 요소들이 순천관에 하나에 남김없이 다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극히 적은 비용과 예산의 숨찬 한도가 우리를 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만족했고 행복했다.

순천관을 비롯해서 다른 기적의 도서관을 방문하는 도서관계 사람들과 사서들 중에는 기적의 도서관 특유의 공간배치를 보며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사서의 자리에서 보았을 때 동선이 길고 들쭉날쭉하고 복잡해서 사용자 아이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고 그래서 관리상의 여러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느냐고 그들은 걱정한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야말로 기적의 도서관이 기획한 의도는 하나이다. 기적의 도서관에서 사서는 무슨 원형 감옥의 간수처럼 아이들의 움직임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기적의 도서관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시선, 사서의 시선, 혹은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자유로움의 향유자이며 그들만의 아늑하고 내밀한 공간을 만들어 그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책 읽고 생각하고 이런저런 꿈을, 어른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고 들키고 싶지 않은 불온한 꿈까지도, 맘 놓고 꾸어보는 어린 몽상자이다. 자유로운 상상과 엉뚱한 몽상이 아니라면 무엇이 아이들을 키울 것인가? 무엇이 그들의 창의력과 호기심과 탐구의 능력을 키울 것인가? 기적의 도서관에는 그래서 다락이 있고 토굴이 있고 여기저기 숨는 공간들이 있다. 그 공간에서 아이들은 숨 돌리며 상상과 공상과 몽상에 잠기고 저희들끼리 놀 시간을 얻는다. 자유로운 상상과 놀이의 시간을 철저히 빼앗기고 있는 지금 이 땅의 아이들에게 그런 자유의 시간, 숨 돌릴 시간, 몽상할 시간을 되찾아 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정말이지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우고자 한다면.
어린이 도서관에 다락과 토굴 같은 유희성 공간을 연출하고 복층구조를 만들고 따스한 온돌마루, 푹신한 소파와 쾌적한 가구, 다목적공간, 이야기방, 영아 수유실과 수면실, 세수대 등을 도입해서 어린이 도서관의 면모를 일신한 것은 기적의 도서관이 이룩한 혁신의 일부이다. 기적의 도서관 등장 이후 전국 각지에서 지자체들이 지은 어린이 도서관들 중에 기적의 도서관을 벤치마킹 하지 않은 곳은 단 한 곳도 없다고 말해도 된다. 순천관 한 곳만을 놓고 말해도, 개관 이후 1년 동안 이곳을 다녀간 방문자는 (어린이 제외) 35만 명을 넘는다. 물론 공간 혁신만이 기적의 도서관이 보여주고자 한 혁신 모형의 전부가 아니다. 어린 사용자들을 위한 정성어린 서비스 체제의 구축, 각종 운영 프로그램의 부단한 개발, 문화 향수기회의 확장 등은 기적의 도서관이 사회에 제시한 서비스 부분의 혁신이다. 도서관 건립과 그 이후 운영 문제에서 시민단체와 방송과 자치단체가 힘을 합쳐 새로운 ‘민관협력’의 모델을 구축한 것도 기적의 도서관이 처음으로 이룩한 혁신에 해당한다.

이 모든 새로운 시도의 핵심부에는 세 가지 기본적인 의도와 정신이 있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책임과 육아의 경비는 온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것, 어린이 도서관은 아이들의 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적 기본 시설이며 우리 사회는 그런 도서관이 설립과 운영에 마땅히 투자해야 한다는 것, 어린이 도서관은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지역 공동체를 일구는 풀뿌리 운동의 중심부라는 것-이것이 그 세 가지 기본 정신이자 취지이다. 이 관점에서 말하면 기적의 도서관이 전국에 몇 개나 지어졌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의 도서관이 의도한 정신과 목표와 취지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그 의미의 사회적 공유가 어떻게 성취되는가가 중요하다. 정기용 교수가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이런 책을 내고자 마음먹게 된 것도 필시 그런 뜻에서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좋은 도서관을 많이 가진 나라만이 기본을 갖춘 나라, 품격과 품위를 말할 수 있는 나라, 창조적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나라이다, 기적의 도서관이 가진 기본 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공유를 시도하는 일에도 혼연히 나섬으로써 건축가 정기용은 또 한 번의 ‘설계’에 돌입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을 건축하려는 ‘정신의 설계’, 그것이 지금 정기용이 이 책에서 하고 있는 작업이다. 나는 한 건축가의 이런 비전과 실천 앞에서 그저 먼 산 구름이나 바라보며 하염없는 부끄러움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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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2003년 11월 순천 기적의 도서관이 개관되고 이제 6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전국에는 10개의 어린이 전용 도서관이 ‘기적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제천, 진해, 제주, 청주, 울산, 금산, 서귀포, 부평, 정읍……. 대도시를 제외하고 전국의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건립된 기적의 도서관은 한마디로 작지만 대단히 중요한 사회적 사건이다. 건축 설계를 담당했었던 건축가로서가 아니라 일개의 시민으로 이 사건을 가감없이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기적의 도서관의 탄생과 운영의 실태는 진보를 믿지 않는 이 사회에 그것을 실질적으로 우리 눈앞에 보여준 기적적인 일들이다.

역사적 판단을 하기에는 한참 이르기도 하고 조금 섣부른 생각도 들지만 그간의 정황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이것은 단순히 공치사만 하고 스쳐지나갈 일은 더욱 아니다. 그래서 적어도 정상적인 사회라면 기적의 도서관 탄생 전후 사안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도 나오고, 무엇이 사회적 이슈인지, 그것이 어떻게 발전하는 것이 이 사회를 위해서 타당한 것인지 고려해볼 논문이 나올 만도 하건만 어디에서도 기적의 도서관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새로운 어린이 도서관들을 지으면서 기존의 기적의 도서관보다 더 낫고 아름답고 품위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도서이서는 순천보다 좀 더 큰 것을 지어야겠다’든가, ‘어느 도서관보다 규모가 훨씬 커져야 된다’든가 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 어린이 도서관이 진정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안 된 것 같다.

모든 공공건물의 건축과 운영 방식은 건립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는 것이지 규모나 외관을 치장하는 것을 경쟁하는 데 있지 않다. 기적의 도서관의 건립 목적은 한마디로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건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건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차별받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책을 접하고 만나고 읽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린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상상하고 탐험하고 꿈꾸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아주 근본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것 이외의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동안 설계에서 완공되어 운영되고 있는 도서관(순천, 진해, 제주, 서귀포, 정읍)과 지금 막 설계를 마친 김해 기적의 도서관을 통해 체험한 모든 것들을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고자 한다.

이 책의 첫 번째 목적은 기적의 도서관이 만들어지는 전후에서 참여하였던 생생한 이야기들을 증언해야 되겠다는 소명감이었고 둘째는, 앞으로 어린이 도서관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데에 참여할 모든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는 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가 한 ㅏ더 있다면, 이제는 공공건축의 품질이 건축가의 손에만 덜려 있는 것이 아니라 건축공간의 내용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 서로 참여하고 협력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름하여 ‘거버넌스식 건축생산 방식’, 다른 말로 해서 ‘협치의 건축생산 방식’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논의할 시대가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대체로 건축의 문제는 건축가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제 건축은 모든 사람들의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건축은 미적 감수성에만 의존하는 형상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떠한 건축이든 우리들의 삶의 질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건축이 사회적 분업화의 결과로 전문영역이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나, 이제는 그 전문영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풍부하게 해야 할 의무가 건축가와 시민들 쌍방 간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건축의 민주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군민이 주인인 공공건축물의 탄생은 이제 권력가나 공무원들의 취향이나 경직된 제도에 의해 생산되던 시기를 벗어날 때가 되었다. 기적의 도서관의 탄생은 바로 협치에 의한 건축생산의 중요한 모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점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2년도에 시민단체 <책사회>의 대표이기도 하고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이자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실천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도정일 선생께서 어린이 도서관을 설계하자고 하였을 때 나는 어린이에 대한 시선에서 설계하거나 어린이들을 관찰한 적도 특별히 없었고 어린이 전용 도서관을 설계한 적도 없었다. 그럴 때 건축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어린이에 대해서, 어린이 도서관에 대해서 듣고 배우고 답사하고 논의하고…… 그렇게 해서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그 때 나를 가르쳐준 사람이 셋인데, 한 명은 당연히 열정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도정일 선생님이고, 또 다른 사람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작은 어린이 도서관들을 운영하고 있었던 대한민국의 위대한 아줌마들이다. 그들의 체험담, 그들이 생생하게 전해주는 이야기들 속에는 어떤 책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가르침이 있었다. 특히 다른 나라가 아닌 ‘한국형 어린이 전문 도서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사랑받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지어진 기적의 도서관들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운영된다고 평가한다면 그 힘은 거의 다 내가 배운 위대한 아줌마들의 힘일 것이다. 그들의 실질적인 체험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볼 수 없는 ‘한국형 도서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나를 가르친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어린 아이들이다. 이 시대는 비록 어린 아이들을 학원과 시험 준비와 경쟁으로 내몰아 넣었지만 그래도 그런 악다구니 같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아이들은 순수한 아이들일 수밖에 없다. 가족들이 모여서 만나는 아이들, 시끄럽고 소란스럽고 천방지축인 아이들, 어린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의 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조금이라도 애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쾌할함으로 가득차 있는 존재가 어린 아이들이다.

한 프랑스의 노(老) 작가가 쓴 아이들과 책에 관한 저서 후반부에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세계인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이 세계인들은 한 나라의 국민이 되기 시작한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여, 우리는 국민 이전의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상상력과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존중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어린이 도서관이나 초등학교를 설계하는 건축가들, 공무원들, 교사들 등 우리 어른들에게.

엄밀히 따져보면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어른들은 우리들이 어린 아이들을 잘못 교육시키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계속 세상이 바뀌기만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빨리빨리 자라나기 때문이다. 기적의 도서관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사회적 효과는 간접적으로나마 아이들 스스로가 교육개혁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서가에서 꺼내 창가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하는 그 순간, 그것이 바로 교육개혁의 시작이다.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즐겁게,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은 교육개혁을 앞당기는 일이기도 하고 어린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행복한 교육개혁, 어린이들에게 햄버거나 콜라가 아닌 상상 속의 꿈을 먹고 살게 하는 공간……. 기적의 도서관은 어른들이 마땅히 해야 할 해묵은 숙제이기도 하다. 어른들이여, 어느 기적의 도서관이든 아이들이 많을 때 조용히 방문하여 30분이라도 머물러 보라. 그곳에서 여러분들이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행복과 불행을 눈물겹게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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