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용에 대하여 >

▶ 젊은 건축가들의 좌담







1986-2010 정기용 건축 작품집 (현실문화 2011)에서 발췌
> 건축가들의 좌담: 건축가 정기용에 대하여 : 서정일․양상현․나승현․조정구

서정일(이하 ‘서’)> 건축가 정기용 선생의 다음 세대 격인 젊은 건축가들이, 정기용 선생의 활동과 작품에 대해 격의 없이 이야기해보자. 우선, 선생이 건축가로서 지금까지 해 오신 여러 가지 활동 전반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뒤에 건축 창작 활동과 작품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한다. 먼저, 정기용 선생과 함께 활동한 경험을 토대로 각자 말해보자.

양상현(이하 ‘양’)> 내가 정기용 선생님을 처음 뵌 건 선생께서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문예아카데미의 건축 강좌를 진행하셨던 1995년이었다. 몇 년간 매주 토요일 건축 강좌를 진행하셨는데 강좌 기획에서부터 강연자 섭외까지 직접 챙기셨다. 강좌 수강생들이 모여 건축단체를 꾸렸고, 몇몇 젊은 사람이 결합하여 민족건축인협회를 만들었는데 초대 의장으로 정기용 선생을 모시면서 인연이 깊어졌다.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 민중과 함께 하는 건축』(원제: Gourna, A Tale of Wwo Village, 하싼 화티 지음, 열화당, 1993)을 번역하신 것을 보고 흙 건축을 고민하시는 것을 알았고, 함께 워크숍도 했다.
당시 정기용 선생이 강좌를 다 기획하셨는데, 강연자가 사정이 생기면 직접 대체하시기도 했다. 당시에는 ‘건축이 문화다’라고 하는, 지금은 낯익고도 사회적으로 충분히 설득되어 있는 주장이 선전해야 할 모토였다. 사회에서 건축을 업자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던 상황에서 대중에게 건축의 중요성, 문화적 측면을 알리고 강조하기 위한 강좌였다. 정 선생님 본인의 강의에서 건축물이 아니라 풍경 사진 하나로부터 건축을 설명하신 것이 기억난다. 주목할 만한 젊은 건축가를 많이 섭외해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당시 젊은 20, 30대들에게 메시지를 많이 던지려고 노력하셨다. 건축을 새롭게 보자, 건축의 의미를 추출하자는 메시지가 많았다. 건축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의미, 도시적 맥락, 형태로서의 미가 아닌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의 의미를 많이 강조하신 것이 인상 깊었다.

나승현(이하 ‘나’)> 건축가의 역할이 첫 번째 화두였다. 건축가와 건축주의 관계를 넘어서 건축가의 역할이 논의거리가 되느냐고 반문하는 건축가들도 있을 것이다. 건축가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펴는데 정기용 선생 같은 분은 드물다. 많은 분들이 애를 쓰시지만, 정기용 선생님이 보여준 건축가의 역할에 대한 상은 여러 가지가 떠오를 수 있다. 특히 초기 민건협과 민예총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인 발언과 교육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민예총에서의 강의 내용은 일반인은 물론 건축실무자나 학생에게도 신선했고 충격적이었다. 학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건축을 접하기 어려웠기에 마치 ‘깨우치는 경험’이었다고 할까. 그러다가 여러 건축가와 함께 서울건축학교의 토대를 만드셨는데, 건축 교육의 토대를 기존 제도권 교육의 틀 밖에서 마련하려는 시도였다. 건축의 후속 세대를 키우는 것 왜에, 문화연대 공간 환경 위원회의 활동은 관과 시민 사이의 접점에서 문화를 만드는 것으로는 건축계에서 드문 경우가 아니었나 싶다. 제가 몸담고 있지만, 몇 해 전 성균관대학교에 건축도시설계원을 만들어 설계와 교육을 접목시키려 하고 있다. 설계원에서 강조하는 핵심은 거버넌스 과정이다. 이번 학기부터는 서울시 공무원, 건축학과 졸업생들과 함께 거버넌스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몸소 추구하고 실천하신 거버넌스 교육 체계 안으로 들여오는 데 역할을 하고 계시다.

조정구(이하 ‘조’)> 정기용 선생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밀접하게 활동해 본 적은 없다. 처음 뵌 것은, 2004년에 베니스비엔날레를 준비하셨을 때다. 건축가가 직능상의 역할만 해서는 안 되고 사실 할 일이 많다고 보는데, 이 점에서 가장 귀감이 되시는 분이다. 건축과 사회, 도시에 대한 생각, 또 그것을 사람들, 대중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일상의 건축, 공공의 건축을 어떻게 다뤄서 삶에 뿌리내리게 할 것인가 하는 주제들... 내가 생각하는 주제를 먼저 몸소 개척해서 하시는 분이다. 내 생각에 힘과 자극을 주시는 분이다.

양> 정기용 선생은 건축가지만 후배․후학에게는 교육자이시기도 하다. 지금 대학교육에서 수준 있는 강의들이 많아졌지만, 당시는 문예 아카데미 강좌 같은 내용이 소중했다. 당시 한국의 실무적, 기술적 성격의 건축설계교육을 넘어, 전통에서 현대 건축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면서 건축을 보는 관점을 넓혔다. 강좌를 통해서건 작품을 통해서건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말뿐 아니라 작품으로 보여줬다는 것이 감동적이다. 면사무소에 목욕탕을 넣자고 하는 식의 발상을, 자의식에 침잠해 있는 건축가들이 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역에서 건축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도 역할을 하셨지만, 건축가들에게도 어떻게 참여하면 좋을지 교훈을 주셨다.

서> 말씀하신대로, 개인 설계사무소 운영 외에도, 민예총 강좌에서 서울건축학교, 문화연대, 설계원에 이르기까지, 남달리 바삐, 또한 일관되게 사회적 역할을 찾고 도맡아 오셨다. 그 역할의 의의에 대해 더 깊이 물어볼 만하다. 건축의 사회적 측면과 관련해서 선생이 하신 일들, 즉 대안적 교육운동이나 시민운동은 외국의 건축문화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정기용 선생을 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요즘은 외견상 더 확산되고 있는 듯 한 건축의 사회적 활동과 주장도, 선생님의 것과 비교할 때 그 내용과 강도, 또는 진정성에서 과연 어떨가 싶기도 하다. 국제적 교육과 경험을 통해 얻은 새로운 것을 푸는 건축가들은 지금도 많지만, 과연 선생의 활동만큼 선도적이고 계몽적이고 충격적이다. 그 이유로는, 선생이 남달리 먼저 선진 건축문화를 먼저 보고 깨달은 세대라는 점도 있겠지만, 선생이 한국의 현실에서 적극 설명하고 적용하려 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선생이 2000년부터 3, 4년 간 집중한 문화연대의 공간환경 위원회 활동 같은 경우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 그 자체다. 뜻을 같이하는 사회 인사들과 결속하여 현실 변화에 개입하려던 활동가적 의지는 선생의 모습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나> 거기에는 절박함과 당당함이 있다. 국내 현실에서 30년 이상 건축 활동을 하시다보니, 사회를 바라보는 면에서 너무 절박하셨던 것이다. 정기용 선생이 지금 새로 또 일을 벌이시는데, 서울시에서 경관건축하면서 한 단계 바뀌는 단계로 거버넌스, 즉 협치가 필요한데, 발언으로는 모자라고 절박하니 설계원 같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감동하게 되는 것은 절박하면서도 당당하기 때문인 것 같다. 정기용 선생은 학생이나 여느 건축가보다 더 공부하고, 독서는 물론 사회의 발언을 듣고 지속적으로 발언하고, 교육 현장에서 자신이 아는 원천을 자기만의 것인 양 속이지 않고 펼쳐놓는다. 이 당당함이 교육 현장에서 신선한 감동을 준다. 양상현 교수님이 정기용 선생이 건축학도와 젊은 건축가들이 맺는 관계를 이야기해주셨는데, 그만큼의 비중으로 사회적 발언을 많이 하신다. 특별강좌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들이 있다. 재계의 임원 부인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강연이었는데, 듣기 편하고 청중의 관심을 충족시켜주는 대신, 첫 10분을 재계의 사회적 문제들을 서두에 대놓고 말하니 처음엔 청중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붉어지다가, 점차 이야기에 동화되더니 끝나서는 기립박수를 쳤다는 식이다. 진심이 있고 당당하니, 누구를 대상으로 하건 건축가로서 사회에 대해 건축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남달리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식의 행위들이 건축가의 역할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양> 건축가에게 작가의 역할을 넘어, 교육적 사회적 정치적 역할까지 기대할 수 있겠지만, 한국사회가 아직은 직접적인 정치 행위를 하는 풍토애서 멀다고 보면, 우리 시대에서 가장 앞선 길을 보여주셨다. 나 같은 386세대도 사회에 나가서 뭘 할지 건축의 비전이 무엇인지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는데, 사회적 역할을 할 가능성의 일말을 보여주셨다. 청년건축가협회라는 단체가 1980년대에 활동하다가 잘 이어지지 못하던 상황을 정기용 선생이 자신의 활동을 통해 맥을 이어주셨던 것 같다.

조> 정기용 선생은 기적의 도서관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많이 알려주셨다. 요즘 나도 도서관을 설계하고 있는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추진하는 한옥건축 공간화라는 사업으로서 한옥 공간을 도서관에 넣어서 전통 공간을 체험시킨다는 취지다. 그런데, 정기용 선생의 선행 작업 덕에, 어린이에게 좋은 공간을 줘야 한다는 당위를 설명할 필요 없이 바로 그 공간을 어떻게 줄 것이냐의 단계에서 논의와 디자인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다음 세대에 큰 도움이 됐다. 기적의 도서관은 어린이에게도 기적이지만 건축가에게도 기적이다. ‘왜 어린이냐’에서부터 시작해 다 설명하려면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 그 과정을 해결해 준 것이다. 대중에게 호응을 얻어 결집시켜 나갔고, 공공의 투여가 없는 우리 사회에서 노력을 모아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나> 나중에 설계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꼭 기적의 도서관이 아니라도 정기용 선생은 건축을 함에 있어 듣는 것에 익숙하신 분 같다. 앞서 안성면사무소 이야기도 나왔지만, 건축가가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파고 공부해서 디자인 하나를 던지는 게 아니라, 마을 주민들을 만나 잘 듣고, 잘 보고, 꿈꾼다. 꿈꾸는 것, 창작의 단계를 포함해서 이 세 과정을 굉장히 활력적으로 하신다. 도서관의 경우, 처음에는 어린이에 집중하기보다는 어머니와 도서관 사서들과 엄청나게 회의를 많이 한 것으로 안다. 건축가가 개입된 도서관이 아니라도 조그만 건물들 하나라도 조금씩 바꾸면서 어린이들에게 책 한 권 더 읽게 노력했다. 어린이들의 행위를 잘 관찰하고 어머니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운영자들의 목소리를 잘 듣고, 공무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일들은 정해진 예산과 기간 안에서 작업해야 하는 건축가에게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온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런 요구들을 정리해서 나열하여 도면화한다고 좋은 건축이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것을 번역하는 것이 결국은 건축가의 역할일 텐데, 사회적 요구, 땅의 요구, 실제 사용자의 요구를 잘 번역했다는 거다. 기적의 도서관들을 가보면 당황스러운 것도 있는데, 가령 빨강 파랑 원색들이 구사되어 있는 것 말이다. 건축가들이 색을 잘 쓰지 못하기에 안전하게 가려고 안 쓰는 측면이 있다. 다른 건축가들이 건물을 보고는 이건 정기용 선생이니까 시도하지 우리는 못한다고들 말한다. 안전하게 하려고 무채색 원재료를 쓰는 경우도 있는데, 정기용 선생은 창작과정에서 어느 샌가 어린이 수준으로 내려와서 자기가 책 읽는 공간에 대해 꿈꾸고 있고 또 어느 순간에는 우주로 날아갔다고 한다. 스케치 나오는 것을 보면 어느 하나, 같은 건물이 없다. 정기용 선생의 엄청난 상상력은, 젊은 건축가들의 상상력 이상인데, 잘 듣고, 잘 보고, 잘 꿈꾸고 상상하는 것이 기적의 도서관에 잘 녹아 있다고 본다.

양> 책읽는사회만들기(이하 책사회)에서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를 만들었을 때, 어떤 건축가와 일하고 싶었을까, 대한민국 사회가 어떤 건축가에게 그 일을 맡길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런 사업을 맡을 수 있는 건축가가 있었다는 것이 실은 다행스러운 것이다. 사회가 원하는 열린 도서관, 커뮤니티 도서관이라고 해야 할까, 어린이의 교육 수혜기회가 부족한 지역에 도서관을 마련해 지역문화를 어떻게 견인할 수 있을지 건축가가 충분히 이해하고 새로운 개념을 실현했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사회의 요구를 건축이 해결하고 실현하지 못한다고 하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것인데, 그것을 해내셨다. 정기용 선생의 작업은 내가 작은 도서관을 디자인 하는 데에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줬다. 많은 건축가가 건축가의 자의식에서 시작하는데, 그것이 건축주, 사용자들과 무관한 경우가 많다. 사용자들에겐 별 의미 없는 데도 건축 작품의 주요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강변하고 믿어 버리는 건축가가 많다. 이 점에서도 정기용 선생께서는 좀 다른 길을 보여주셨다. 즉, 건축가가 자기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물론 공공성이 강한 프로젝트들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자기 손 안에서 나오느냐 세상에서 나오느냐의 차이를 보여준 것이 사회적 건축가의 또 다른 면모였다고 본다.

조> 저는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건축은 여러 사람의 목소리, 보이지 않는 관계 같은 것을 다 받아들여 결정체를 만드는 것 같다. 가끔 그 점이 일하면서 흥미롭고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리 많은 시민운동가나 주민이 모여도 그것을 만들지 못해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어떤 사회적 형상, 공공의 형상, 삶의 형상을 만들어 갈 때, 민가건축처럼 오래도록 주거를 단련해서 만든 것도 있지만, 요즘 시대와 같이 새로운 공공시설을 만들 때, 건축가가 핵심이 되어 그것을 받아들이고 형상으로 끌어들여서 보여주는 사람, 그런 역할을 정기용 선생이 제일 먼저 하신 게 아닌가 싶다. 꿈꾼다고 표현하셨는데, 어떤 걸 보면 지역적인 냄새도 나고, 어떤 것은 아이들 공간처럼 창의적이다. 이런 것을 보면서 건축가의 역할을 생각하게 해준다는 것이 이모저모로 중요한 것 같다.

나> 선생님의 사무소에서 일한 지 4, 5년 됐을 때, 속상해서 한 소리한 적이 있다. 끊임없이 만들어내시는데, 어떻게 매번 자꾸 다른 것을 만드시느냐. 신기하다.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다 좋은데, 도서관을 다 다르게 할 것이 아니라 똑같은 디테일을 쓴다거나 해서 축적되는 데이터가 있으면 사무실 운영 측면에서 좋지 않으냐, 매번 완전히 다른 것을 시도하기보다 한쪽에 초점을 맞추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정기용 선생 답변이, 땅을 보니 땅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셨다.

양> 정기용 선생이 미술대학 출신이라서 그렇지 않나 싶다. 미적인 상상력, 프랑스 교육, 이런 것들이 한국의 주류 건축가들의 사고방식과는 약간의 단층이 있어 보인다. 관계상의 단층이나 감성의 단층이 우리가 봤을 때, 다른 건축가와 다르게 만드는 계기가 아닐까 싶다.

서> 정기용 선생의 동년배나 동세대 건축가와 비교하면 선명한 차이가 보인다. 특히 한 가지를 말하자면 정기용 선생의 건축은 독자 논리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예술 분과들과 폭넓은 문화적 맥락 안에서 소통할 수 있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개방적 태도를 가지신 것 같다. 그것이 그분의 상상력 원천인 것 같다. 시각적 상상력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다른 책에서 어떤 분이 정기용 선생은 건축시인이라고 하셨는데, 창작 일반에 대한 풍부한 교감과 이해가 그 상상력의 기반인 것 같다. 물론 앞서 반복해서 말한 현실적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그런 상상을 한다면 매력을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사람들이 기대는 하지만 찾지 못하는 구체적 형상과 언어를 사람들의 요구에 닿아 있는 상태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을 갖게 되는 사람은 그것도 기대하지 못한 방식으로 충족되는 즐거움이 클 것이다.

양> 전체적으로 보면, 정기용 선생은 한국건축계에서 다른 선을 그으셨다. 어쩌면 경계에 서 계셨고 지금도 한복판이라기보다 경계에서 건축의 외연을 넓히셨다. 그 확장하는 부분이 건축과 사회의 접점이었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 현대 건축사에서 중요한 지점들을 열어주신 것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한국 건축계에서 정기용과 정기용의 집단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점이 있다. 의사 집단들도 인도주의 실천하고 봉사하는 의사들이 있어서 전체 의사들의 과오도 비난을 좀 덜 받는 법인데, 건축계에서 과연 누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가 물어보면 정기용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수익이 안 되지만 사회에 공헌하는 일도 많이 하셨고, 그 점 때문에 건축계 전체가 다른 부분에서 반사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돈 되는 것 하는 분들이 돈 안 되는 것 하는 분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측면들이 있는데, 그런 감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조> 건축은 조직이 움직이는 것이다, 선생께서 여러 가지를 제안하고 계시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뒤에는 같이 일하는 보이지 않는 스태프들의 지원이 필요하다. 그것이 늘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런 것도 함께 지켜봐야 한다. 향후 정기용 선생뿐 아니라 정기용 선생의 정신적 가치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도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하고, 숨겨준 협력자들의 노고도 지켜봐야 할 것이다.

서> ‘자발적 순교자’들이 꽤 있다. 기용건축과 같은 성격의 설계사무소에는 좋은 건축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긍지로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며 견디는 사람들이 있다.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왔으니. 지방에서 공사하다가 자금과 행정의 벽의 부딪히면 아예 제 돈으로 건축 자재를 구입해서 해결하는 이상한(?) 분도 있다.(웃음) ‘마니아’에 비견될 만한 이런 정도의 결속력과 집단적 가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나> 대안이라기보다는 절실하게 공공건축가 제도 같은 틀 안으로 들어오길 바라시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결국 일반 사무소들도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고, 더 이상 개인의 희생을 바라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무소 경영에 대한 비전과 더불어 제도적으로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정기용 선생이 학생들에게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대가병, 문화병, 유토피아병에 빠지지 말란 당부다. 대가병, 즉 소위 건축 작품집과 저널에 실리는 3%, 1%가 채 안 되는 소수 건축가의 모습만 바라보는 병. 문화병, 즉 사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즐길 줄 아는데 건축하니까 나만 영화며 음악을 즐길 줄 안다는 식의 관념. 유토피아병, 즉 내가 세상을 바꾼다든가 도시를 바꿀 수 있다는 식의 병이 그것이다. 그런 세 가지 병에서 벗어나 작가주의 건축 말고도 공공건축가, 문화재 복원 전문가 등 다양한 모습의 직업적 포진이 이루어진다면 지금처럼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이 매번 할 때마다 새롭게 힘들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넘을 수 있지 않는가를 생각하시는 것 같다.

양> 사실 선배 건축가들이 공공적인 활동을 외면해 왔다기보다는, 생계 측면 같은 난관 때문이었던 것도 크다. 기용건축처럼 작은 조직과 거기에 속한 개인의 이른바 순교적 희생이 지금까지 공공적 활동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면 앞으로는 사회적인 건축 생산활 동의 체질 자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이 마을의 공공건축가, 이 마을의 주치의가 되라. 사실 무책임하다. 그런 걸로 먹고 살 것 같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걸 해결해줄 수 있는 공공건축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또 다시 권력화 될 측면도 우려된다. 대안적 건축이 주류가 되어 추심을 잃는 씁쓸한 예들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늘 긴장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서> 구체적인 작품을 놓고 정기용 선생 디자인의 고유한 성격을 말해보자.

나> 흙 건축이야기로 시작해 볼 수도 있겠는데, 아마 싫어하시는 말 중에 하나가 흙 건축 전문가라는 말일 것이다. 본인은 건축을 하는데, 어떤 경우엔 흙도 쓴다. 건축가들이 거리낌 없이 벽돌도 쓰듯이 말이다. 지금 까지 우리 대화에서는 교육을 비롯해서 사람과 관계된 말을 많이 했지만, 선생의 건축의 다른 한 축은 자연이라든지 우주라든지 지구라든지 땅이다. 사람이 사는 건축이기도 하지만 잠시 빌린다는 생각이다. 맥락에 따라 어떤 부분은 흙을, 어떤 부분은 유리를 쓰곤 한다. 흙건축에서 콘크리트를 함께 쓴 이유를 들으면, 사실은 콘크리트도 고마워해야 하는 재료이고, 알고 보면 그것도 결국 자연에서 나오는 재료이고, 건축을 하는데 매우 유용한 도구이고, 구조적으로 안전하고 형상을 만들기 편리한 재료라는 입장에서 바라본다고 설명하시더라. 그때그때 맞춰서 땅에 앉히는데, 어떤 재료를 어떤 식으로 조망하고 어떻게 하늘을 바라보고 순환하고, 그런 차원의 이야기를 푼다.

서> 내가 선생의 작업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것의 하나는, 순천 기적의 도서관 처마 길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주 신중했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시면서, 늘 엄밀한 치수를 주장하셨다. 기존의 경험을 중요한 교훈으로 삼는 자세다. 특히, 주택 디자인에서는 햇빛, 바람, 식생과 같은 이른바 환경이라고 하는 데서 민감한 방법과 척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 같다.

나> 도시와 건축의 반응이 흥미롭다. 무애빌딩과 (작품집에는 실리지 않을) 서초동 안나빌라 같은 경우, 잘 모르고서는 형태가 그다지 세련된 매력이 없다는 게 대부분 받는 첫인상일 것이다. 그런데 건물 하나로 도시와 대응시키기 어려울 것 같은데도 무애빌딩의 경우 거의 막다른 골목에 일층부를 틔워 놓아 지나기 편하게 만들어 두었다. 정기용 선생이 조건영 선생의 JS빌딩과 대화하는 건물이라고도 설명하지만, 그보다는 저층부에서 의식적으로 열려 있는 것이 더 쉽게 피부에 와 닿는다. 다세대주택인 안나 빌라에서는 각 주호로 올라가는 방법들이 다다르다. 조그만 집에서도 도시와 만나는 방법들을 고민했다.

서> 디자인 어휘가 건축물의 대지마다 상당히 다르다. 다른 오피스 건물들과도 매우 다르게 보이는 무애빌딩은 얼핏 외관을 보면 대학로의 파편성이라고 할까, 복잡한 것을 수용하고 파편을 종합한 듯 한 인상을 준다.

조> 정 선생님 작품인지 모르고 무애빌딩을 답사했는데 인상이 매우 강했다. 내게는 대학로의 파편성보다는 막다른 길, 어둡고 그늘진 곳에서 강건하게 있을 수 있고 다가가면 개방적인 것이라고 봤고, 무엇보다 현학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즉, 장난을 쳐서 복잡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매스를 들인 작업 의지가 그대로 형상화된 것 같아서 신기했다.

양> 흥미로운 비교가 될 것 같은데, 무애빌딩을 보면 또 다른 의미에서 실천적 건축을 말하고 이끈 건축가로 조건영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조건영 선생의 JS빌딩이 선언하는 건축이라면 무애빌딩은 대학로를 수용하고 호소하는 것 같다. 수용하고 호소하는 것이 정기용 선생의 일관된 특징이 아닌가 싶다.

나> 무애빌딩은 겉에서 보면 물성이 매우 강해 보이는데, 속에 들어가면 굉장히 밝고 열려 있다. 두 가지가 충돌하는 측면을 굉장히 잘 활용했다.

서> 정기용 선생의 스케치에서 건축 형태를 들여다보면, 그 논리를 모호하게 남겨두지 않고 명료하게 정리하려는 노력이 강해 보인다. 표현적으로 보이고, 얼핏 아주 직관에서 나오는 듯해 보이는 것도 사실 엄밀한 논리를 찾으려고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나> 파주 열림원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파주는 어떻게 보면 건축가가 만든 도시인데, 내가 볼 땐 처음 건축가들의 계획에 의한 건물들이 들어설 때는 너무 잘 디자인되고 정의된 형태와 총수 때문에 사실 이질적이고 어색해 보이기까지 했다. 열림원은 건물들이 어느 정도 들어선 중반 이후에 지은 것인데, 정 선생님의 일종의 대응논리가 들어가 있는 것 같다. 다수의 건축가들이 가지런하고 반듯하고 매끈하게 한 것에서 그 논리를 따르는 상황에서 조금 다른 모습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듯하다. 사실 열림원이 준공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이질적이고 낯설어 보여 정기용 선생께 들어볼 정도였지만, 작년에 가 봤더니 여름에 건물 위가 완전히 녹색으로 뒤덮여 있는 모습이 그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건축가들이 시간성을 담기 위해 벽돌이나 내후성 강판도 쓰는데, 건축이 시간성을 담는 모습을 누가 봐도 솔직하게 보여주는 건물이었다. 어쩌면 내가 처음 가보고 느낀 어색함은, 건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정 선생님이 의도한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처럼 완전히 뒤덮여 있고 살아 숨쉬며, 건물이 시간 속에서 완성되는 그런 면이 놀랍다.

서> 열림원처럼 코리아다아트센터도 녹색 건물로 디자인됐다. 서 있는 정원 또는 녹색의 피의 시도 자체도 선도적이지만, 그저 녹색 생태 건물이 아니라 화장품회사의 화장품재료인 식물을 건물의 수직면과 옥상 정원에서 자라게 한다는 한층 심화된 논리가 결부되어 있다.
‘산에서 걸어 나온’ 열림원의 그린 코리도의 질서를 변형해서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태도다. 다시 말해 녹색을 효율을 위해서만 또는 기계적으로 쓰기보단 적정한 순간에 적정한 방식으로 다른 용기들과 결합하는 방식이다.

나> 열림원 건물 3층 내부인가에 좌식공간이 있다. 민속장판이 깔려 있고, 내부에 흙벽돌이 있다. 다시 한 번, 겉의 강한 물성과 달리 안은 따뜻한 느낌을 주는 건물 같다. 건물을 하나의 논리로, 건물 전체를 안팎으로 다 뒤집어 싸는 게 아니라, 실내공간은 실내 공간대로 좌식공간에 맞도록 했다. 실내에서 바깥을 보는 풍부한 공간적 경험이 있는 건물이다.

서> 특정 스타일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은 반대로 그 자유로움을 증명하는 것 같은데, 무주에서 실현한 지역 건축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 중에 무주 곤충 박물관은 곤충 전문가를 찾아가 물어 발견해 낸 사실을 토대로, 드러나지 않고 감춰져 있는 내용을 발견하고 그것을 시적으로 드러내고 강조하는 선생의 창작방식을 대변한다. 이런 식의 발견적 접근과 표현성에서 보기 드문 건축가다.

나> 그런데 저런 꼼꼼한 접근은 스태프들이 따라가기 힘들다. 10개 중 예닐곱이라도 실현하면 좋겠는데 쉽지 않다. 무주 부남면에 별 보는 집이 있는데, 계획안을 보고는 개인적으로는 갸우뚱하고 이상하다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가 보니 느낌이 무척 편안했다. 애들이 자전거 타고 경사를 오르락내리락하고 망원경으로 보고, 느낌이 안온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다시 봤더니 사진에서는 그 느낌이 안 났다. 흔히 사진 잘 찍히는 건축이다 아니다 하는 말을 머리로 알다가 몸으로 직접 느낀 경우다. 정기용 선생의 건축은, 사진으로 볼 때와 직접 느낄 때가 다르고 찍어온 사진을 다시 봐도 다를 수밖에 없다. 땅과 하늘과 만나는 방법, 사람들이 경험하는 방법이 통합되어 있는 것이지, 어느 한 조망점에서 그럴싸해 보이기는 힘든 건물인 것 같다.

조> 선생님의 작업을 쭉 보니까 굉장히 다양한 매스가 있는데도 공통적으로 마당이랄까 비어 있는 공간을 두고 있는 것이 내 눈에 들어온다. 또한 지형적이라기보다는 자연에 귀속되어 있다는 점, 긴축적인 영역이 아닌데 건축과 함께 되어 있는 점인데, 내가 알기로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일본의 무라노 토고하의 작업이 가장 근접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합리적인 건축설계가 한쪽에 있으면서도 다른 한쪽에는 아까 봤듯이 산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자연에 있는데, (이것이 합리적인 건축설계로는) 잡히지 않는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누구의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기용 선생의 독자적인 상상의 형상이다. 사실 많은 건축가들은 누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계열이 있건 자기 스타일의 반복이 있는데, 선생은 작업은 다 다르다는 거다. 한편으로는 상당히 놀라운 점이고, 한편으로는 스태프들이 일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료 축적이 안 된다는 것은 조직이 일할 때 엄청나게 어려운 점이니까.

나> 노무현 대통령의 사저 같은 경우도 정기용 건축의 핵심을 말할 수 있는 두세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선, 처음에 지어질 때 건축가와 건축주가 지붕을 낮게 앉히고자 했다는 건데 나는 처음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가 보니 마을에 비해 집의 규모가 커 보였고, 땅에 앉히는 방법이 이질적이기도 해 보였다, 정해진 규모도 있고 하니 낮추려 애쓰셨겠지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가 보고 놀랐다. 사저 대각선에 조그마한 규모의 2층짜리 이장집이 있는데, 길에서 보니 그 이장집이 사저보다 두세 배는 커보이더라. 정작 사저는 규모가 더 큰데도 잘 안 보이고 낮게 숨어 있다. 땅에 건물을 어떻게 앉히고 또 작은 도시, 조그만 마을, 건축주가 원래 살던 곳에 집이 어떻게 앉혀져야 하는지 문제에서 결국은 성공한 것이다. 지금 마을에 계속 건물들로 채워지기 시작하는 시점에서야 이 집이 얼마나 낮고 편안하게 앉혀져 있는 것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 선생님이 쓰신 글을 모은 『사람 건축 도시』에 어릴 적 을지로의 한옥에서 사신 이야기가 잠깐 나오는데, 내가 볼 때는 선생님의 건축에서 한옥적인 측면이 많이 읽힌다. 특히 사저작업에서는 마당이 결정적인 요소인 것 같다. 한옥이 아니면서 한옥을 구현했다. 또한 이 방식에서 경계가 없어서 좋다. 도시형 한옥은 사실은 약간 경계가 있고, 전통 한옥으로 가면 대청 같은 경우 창이 없듯이 경계가 없다. 이 집에서 그런 것이 느껴졌다. 사진을 보면 신을 신고 들어가는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트여 있는 곳이 보인다. 건축물을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그런 점이 신기하고 잘 구현된 것 같다.

나> 성북동 주택의 경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나중에 박물관으로 쓰겠다는 할머니의 바람이 있었다. 주택 설계에서 지금 사는 사람들, 나중에 살 아이들에 관한 따뜻한 이야기만 오고 가는 것은 아닐 테고, 건축주가 보통 평생에 한 번 짓는 주택에 대해 건축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다른 성격의 바람도 있는 법인데, 그런 것을 너무 티 나지 않게 부분 부분 장치해 놓는 조정 작업이나 재현을 주택에서 많이 고심한다는 생각이 든다.

서> 전시관 같은 기념비 작품도 많이 하셨고 그것에 대해서는 책에도 많이 쓰셨다. 주택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사연을 말하고 설명할 수 없는 법이지만, 그것을 듣고 알게 될 때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주택에 대한 섬세한 이야기가 많다.

나> 일화를 하나만 더 소개하면, 성북동 수택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한번은 이렇게 만들면 좀 불편해지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저 공부해서 나오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나이 들어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닌, 애정을 가지고 수십 년 할 때, 이른바 컨셉이 아니라 일상적인 편안한 말로 주택 설계를 진행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 드러나건 숨어 있건 작품 전반에 이야기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잘 들으시고 이야기로 풀어내시는 상상력 때문인지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삶의 이야기가 풍부히 담길 수 있는 주택들, 어린이 도서관, 지역 커뮤니티 작업 같은 데에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 애정으로 공간화해내는 탁월한 작업들이 인상 깊다. 흙건축의 가능성을 보여주신 흙과 관련된 작업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서> 구인헌을 잡지에서 봤을 때는 놀랐다. 내가 알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너무 외관이 단정하고 평면도 단순해서, 크게 생각을 바꾸셨나 하고 오해할 정도였다.

나> 형태 위주로 작업하기보다는, 구인헌 같은 경우, 흙은 비에 취약하니 콘크리트 박스로 지붕을 든다는 식으로 접근했으니까 저렇게 나온 것이었을 테고, 다른 건물에서 형태가 복잡하다는 것은 그 땅과 프로그램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인헌에서는 흙이 가진 재료적 성격, ‘흙아 너는 어땠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할까. 흙의 비가림막이 필요했기에 이런 형태적 단정함이 나올 수 있다는 식으로 정기용 선생의 건축 어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 그러면서도 콘크리트와 흙벽 사이에 생기는 간격, 앞의 담장과의 간격 등을 잘 썼다. 흙건축의 협력자인 신근식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때 아주 신기했다. 굉장히 네모반듯한데, 집 구성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게 굉장히 잘 들어가 있었다. 내 생각에도 이리저리 넘나드는 폭이 놀라웠다. 대중적 형태가 나오는가 하면 어떨 때는 친근하면서도 단정한 걸 만들어 내신다. 다른 작가에 비해서 이 건축가의 세계가 참 넓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양> 정 선생님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조선 후기에 찍은 흙집의 자료를 본 적이 있다. 토담집 치는 방식으로 건축하는 방식이었는데, 우리한테 익히 있었던 방식인데 근대화하면서 없어진 것이다. 그것을 프랑스에서 흙 건축에 관한 지식을 가져오고 알려주어 보여주시고 결국 현실화하셨다. 90년대만 해도 가능성만 있을 뿐이었지 실제로 된다고는 생각 못했다. 그때 1미터짜리 담을 쌓아놓고 이렇게 될 수도 있다 하고 놀란 정도였는데, 10년이 지나 실제로 저렇게 집이 지어진 모습을 보면, 씨앗 같은 것을 싹 틔우고 지평을 열고 사라진 전통 기법을 되찾도록 한 노력, 이것은 굉장히 큰일이라고 본다.

나> 땅, 경관을 소중히 다루신다. 건축가들도 다양해서 초기에 대상지를 한두 번 둘러보는 걸로 그치거나, 공사 현장 보는 것을 꺼리는 분도 일부 있는데, 정기용 선생은 계획대지건공사현장이건 땅 보러 가는 것을 무척 좋아하신다. 무주도 내려가는 것이 힘들지만 다녀올 때마다 치유되는 것 같다고도 하셨다. 봉하 사저 지을 때도, 처음에 일하게 됐을 때 땅을 보러 가셨는데, 집 짓는 땅 앞에 논이 펼쳐져 있어 좋아서 한참 몇 킬로미터를 걷다가 화포습지가 있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 습지 사진을 노 대통령에게 보여 주여 이야기를 꺼냈더니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내외가 연애했던 장소였으니까. 몽고 대통령한테 받은 말 두 마리에 청소년들을 태워 그리로 다녀야겠다고 했다 한다. 퇴임 후에 늪지 청소를 하는 모습을 봤다. 홍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건축주의 개인적 기억을 몰랐는데도, 땅이 이끄는 대로 좋아서 걷고 화포습지와 만나고 제안하고... 고맙다, 잊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일을 그저 일로만 대하면 그런 사건은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길 가다 예쁜 야생화를 만나면 그 사진 찍느라 십분 이십 분 가지를 못하는 분이다. 국토를 소중히 여기신다. 봉하 주택도 정기용 선생이 건축주를 대하는 태도, 땅과 대화하는 방식 등 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다.

양> 지금도 작업하시는 건축가이니 결론처럼 말씀드리는 게 섣부르지만, 정 선생님은 작가 곧 디자이너의 미적 측면에서의 건축의 아름다움과 여러 가지 대지를 해석하고 관점을 보여주신 것 같다. 한국건축계에서 후배로서 정기용 선생께 고마움이 있다면, 사회적 건축가로서의 길을 열어주셨고 그걸 여러 후배들에게 보여주신 점이다. 단순히 말만 하신 게 아니라 실천하시고 작업으로서 푸시는 과정으로 길을 열어주셨으니.

서> 작가로서 내면을 파 보면, 그런 활동을 하고 역할을 수장할 배경이 있었다는 것, 아주 견실하고 훌륭한 건축가임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그분의 건축 어휘가 가진 건전함, 어떤 면에서는 고전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만큼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것, 적절하고 올바름에 입각한 판단이 후배건축가들에게 귀감이 된다고 본다. 그래서 정기용 선생의 사회적 역할만큼이나 작가로서의 능력이 함께 조명 받아야 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조> 끝으로 한마디 하자면 우리 세대 건축가에게 귀감이 되는 권력화 되지 않은 건축가이고 사실 그것이 가장 중요해 보인다. 열린 정신, 자기 건축을 가지고 권력을 가지지 않은 분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다. 바라는 점은, 굉장히 많은 작품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논의하기에 아깝다는 생각이다. 흙이라든지 도시에 대한 관심, 공공건축가 등의 주제는 그 시대에 너무나 필요해서 관심을 두고 하신 일들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조명해서 그 작업에 대해 좀 더 냉정하고 세세한 평가와 분석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굉장히 재미난 이야기, 또 하나의 우리 시대의 단면이 드러날 것 같다. 상상력이 풍부한 한 건축가가 프랑스 유학 그리고 서울과 지방 도시를 경험하고 자연을 체화하면서 어떤 변화를 겪어서 나왔는지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 또 하나의 작품집이 기대된다.

나> 앞서 여전히 현업을 하고 계시니 끝이 아니라 조심스럽다고 말씀하셨는데, 현재 진행형인 정기용 선생의 또 다른 모습은 몇 년 전부터 함께 해온 조성룡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젊은 건축가들이 뜻이 맞는 사람끼리 같이하는 경우는 있지만, 본인들의 고유 영역이 구축된 분들이 공간을 같이 쓰고, 여러 일들을 함께하신다. 독특한 그 관계로부터 풍부한 건축 어휘, 도시 어휘가 향후 몇 년 안에 제시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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