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사는 도시에 대하여 >

▷ 서울 이야기

▶ 반복과 차이





서울이야기 (현실문화 2008)에서 발췌
>반복과 차이

허위의식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일 뿐이다. 새롭게 보도록 길들어 있을 뿐이다. 건축역사에서의 큰 혼돈은 바로 외부로 드러난 형상의 차이가 너무나 크고 압도적인 나머지 그 밖의 부분들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데에 있다. 사실은 바로 형상 자체보다도 정형을 이루어내던 내재적 질서, 그리고 바로 그러한 질서에 가치를 부여하고 힘을 실어주려던 시대정신이 더 중요한데도 말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다원주의 문화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고 온갖 종류의 탐색과 창의력이 넘쳐나고 있는 시절에 건축이 마땅히 의지해야 할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모더니즘의 고전적 의미의 중요성은 사실상 외형으로 드러난 도형적 형식이나 시각적인 새로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이념이나 삶의 방식을 담지해낼 수 있는 탄력적인 랑그(언어)의 발견이었다. 그럼에도 몇몇 대가들의 개별적 파롤에 보내준 갈채는 위대한 업적의 당위성에도 모더니즘의 신화로 전환되었고 결과적으로는 건축을 건축인들만의 전유물이나 암호처럼 축소시키고 말았다. 특히 현대건축의 흐름 속에서 변방에 밀려나 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들에서 건축이 사회와 관계를 맺는 탐색들은 전무하다 싶었다.
건축이 사회와 관계 맺는다는 말은 건축언어가 특정인들 간의 암호로서가 아니라 일반인들과 소통을 이루어낼 자연언어가 된다는 의미다. 그러면 왜 언어를 암호로 만드는 것을 선호했을까? 누가 모더니즘을 신화로 만드는 것에 더 적극적이고 호감을 가져왔을 것인가? 그것은 당연히 건축을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에서부터 시작된 일이다. 암호놀이는 건축 밖의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 무엇이고, 거장들의 건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배우기 전에 왜 건축이 존재해왔으며, 어떻게 건축을 하기보다 왜 건축을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생각들을 깊이 하지 못했다. 곧 건축을 읽고 생각하기 전에, 언어를 자신의 모국어처럼 이해하기도 전에 쓰는 법만 가르치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암호를 해독할 능력과 함께 건축을 ‘작품’으로 포장하는 기술만 배운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서 외국의 신종 유행어를 식별하고 모방할 ‘눈치’를 배운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허위의식을 주고받은 공범자들인 셈이다. 이 땅에 새겨진 온갖 추악한 환경을 방치한 책임은 사실상 건축과 도시공간 생산에 종사하는 도시인, 건축인 모두의 몫이다. 만일 우리가 허위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윤리적 의식으로 무장된 건축인을 키워내었다면, 대가들의 건축 예찬보다 일상환경에서 빚어지는 모순들의 구조를 읽어주고, 새로움보단 낡은 것으로 폐기처분한 생각들을 일깨워주고, 건축(부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시(전체)도 똑같이 중요함을 역설해주고, 인간을 위해 건축하는 것이란 추상적 개념보다 구체적이고 실재하며 의식 있는 개개인을 위해 건축을 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일깨워주고, 루이스 칸의 빛만큼 안마당과 대청마루에 떨어지는 은은한 빛의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다면 그래도 우리는 개판만도 못한 이 땅의 축조된 환경을 외면하고만 있었겠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건축행위가 아무리 개인의 사고에 의존해서 탄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작품’이기 이전에 하나의 공공적 표현이다. 왜냐하면 재산은 사유화할 수 있지만 건축과 도시의 존재 자체를 사유화할 방도는 없기 때문이다. 사유지 안에 세워지는 건축은 동시에 지구 위에 구축되는 건축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건축은 그 태생이 공공적이다. 우리가 건축을 그토록 윤리적 범주 안에 넣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며 건축을 개인의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윤리적 실천으로 다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설사 건축을 작품으로 만든다고 하여도 공공성의 그물망을 빠져나갈 수는 없다. 작가적인 의식에서든 건축가로서 윤리적인 실천이든 건축행위는 그 자체가 사회적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인은 우리를 향해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세상에 말을 건네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인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공인이다. 이런 사회적 위치의 중요성과 건축행위의 공공성을 외면하면 할수록 위대한 건축가가 될 것 같은 착각은 바로 위에서 말한 ‘허위의식’의 전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이 이렇게 이 땅에서 오래 지속되는 동안 건축은 문화로서가 아니라 우직 하나의 궤도 안에서만 형식적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의식 있는 건축인이라면 의미의 물줄기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 더 이상 지연시킬 명분이 없다. 어느 누구도 건축이 문화의 큰 물줄기로 흐르는 것을 비난할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물꼬를 틀 생각을 건축인들 밖에서 준비하는 사람도 없다. 작은 지류를 만들어 의미의 큰 줄기를 만들어갈 사람들은 건축인 자신들밖에 없다. 사회적 발언이 필요할 때 발언하고, 실천이 필요한 곳에 힘을 모으고, 감시와 비판이 필요한 곳에 시선을 모아서 그 물줄기가 있음을 세상에 알게 하여야만 한다. 다만 우리 모두는 허위의식으로부터 탈출하여 현실세계로 상륙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진화하여야만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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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오시테가
진화론자들은 악어보다 덜 흉측한 네 발 달린 물고기 이시오시테가가 물 속에서 뭍으로 올라온 이유를 미지의 땅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욕망은 이시오시테가의 지느러미를 발로 진화시켰으며, 발을 이용하여 육지로 상륙하였고, 그다음 중력을 견뎌내기 위해 튼튼한 뼈가 발달하였다고 한다. 만일 생명이 물속에만 있었다면 지구상에 이렇게 많은 생명의 종이 탄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는 생명을 길러낸 고향이다. 어린아이의 탄생 과정은 동물의 탄생과 진화의 역사를 반복한다. 자궁 속의 물은 바다이고 어린이의 탄생은 땅 위로의 상륙이다. 이시오시테가의 진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수중 속에서 갇혀 있던 건축인들은 이제 뭍으로 상륙할 때가 온 것 이다. 온갖 허위의식의 바다를 벗어나 무거운 현실의 중력을 이겨낼 튼튼한
골격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종의 다양성만큼 다양한 생명력이 넘치는 건축을 할 때가 다가온 것 이다. 이때의 건축이란 땅 위에 일으켜 세우는 개별적 건축만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고 우리가 공유해야 마땅한 문화적 가치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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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산업사회와 관료주의사회, 군사독재사회, 천민자본주의시대에 배운 교훈들은 역설의 진리들이다. 전통이 사라져야 전통이 살고, 건축가가 죽어야 건축이 살고, 정치가가 죽어야 정치가 살며, 학교가 죽어야 교육이 살아나고, 교수가 사라져야 학문이 산다. 농업 정책 이 사라져야 농민이 살고, 기업이 망해야 경제가 살며, 역사가 죽어야 참다운 역사가 살아난다.
허위의식은 역설을 낳는다. 역설을 풍자로서가 아니라 처절한 고통의 눈물로 받아들일 때만 진리가 된다. 전통을 말하고 민족주의를 말해야만 한국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앞세우는 사람들일수록 배타적 이고 전통과 민족의 잣대로 서열 매기기를 즐긴다. 건축을 기념비적으로 해내야만 건축이 되고, 건축만이 열악한 환경을 구원할 가장 강력한 힘 이라고 믿는 건축가들이 많아지는 한 건축은 언어로서가 아니라 폭력으로 작동할 것 이다.
정치개혁을 부르짖고 새로운 정당이라고 표방한 정당일수록 똑같은 정치꾼들의 이합집산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신新’ 자가 붙을수록 가장 구태의연하다. 교육이 제도로만 남을 때 교육은 개혁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이 땅에서 교육의 개혁이란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교육을 사회의 여타 제도의 틀을 유지하면서 개혁 하려 하기 때문이다. 교수가 사라져야 학문이 산다는 뜻은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그들의 지위를 빌어 권위는 누리되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역사가 죽어야 역사가 살아난다는 말은 역사에서 객관적 사실만을 확인하려던 종래의 과학적 역사의 서사구조를 버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통해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들을 찾아내려는 ‘신문화사’적인 관점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것도 ‘두껍게 읽고’ ‘다르게 읽으며’ 결과적으로 기존의 잘못된 고정관념들을 ‘깨뜨리기’로 통합시키려는 태도는 역사를 보는 관점의 이동을 의미한다. 정치사에서 사회사로 넘어간 물줄기를 문화사로 새롭게 읽어 역사를 재해석 하려는 방법은 역사를 살아남게 하려는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공들을 소수의 정치지배자들로부터 이름 없이 사라진 절대다수의 정 신세계로 돌려놓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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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말
건축가들은 지난 시대의 미적 가치로부터 출발하여 동시대적 요구에 따라 그들의 언어를 재구축한 것을 강요 받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모든 것은 결과적으로 있는 것으로부터 유래한다는 말이다. 기존의 아주 작고 미세한 것이지만 두껍고 풍부하게 읽어내는 힘으로 반복된 차이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우리는 새로운 건축의 탄생을 위해 건축적 진화의 전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만 발견 되는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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